‘완화 의료’라는 단어를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치료를 멈추고, 고통을 줄이며,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항암제’는 질병을 치료하고 생명을 연장하는 대표적인 수단으로 인식되곤 합니다. 그래서 “완화 의료를 받는 중이라면 더 이상 항암 치료는 하지 않는 것”이라고 단정짓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실제 완화 의료의 목적은 단순히 치료를 중단하고 환자의 삶을 마무리하도록 돕는 것만은 아닙니다. 완화 의료의 본질은 ‘환자의 고통을 줄이고, 남은 삶의 질을 최대한 높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항암제도 완화 의료의 일환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경우, 항암 치료의 목적과 방식, 환자 상태, 기대 효과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신중히 결정해야 합니다.
이 글에서는 “완화 의료 중에도 항암제를 사용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론적 근거와 임상 사례, 적용 조건, 제도적 현실, 가족이 알아야 할 고려사항까지 폭넓게 정리해보겠습니다.
완화 의료에서 항암제 사용이 가능한 이유
전통적으로 완화 의료와 항암 치료는 분리된 영역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하나는 치료를 목적으로 하고, 다른 하나는 증상 완화를 목적으로 한다는 이분법적 사고 때문입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경계가 점점 흐려지고 있으며, 완화 의료 중에도 환자의 상태에 따라 항암제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 임상종양학회(ASCO)는 이미 2012년부터 “완화 의료는 항암 치료와 병행되어야 한다”고 권고한 바 있으며, 세계보건기구(WHO) 역시 완화 의료가 치료 중인 환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음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항암제는 단지 생명 연장을 위해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양의 크기를 줄이거나, 종양으로 인한 통증이나 출혈, 폐색 등의 증상을 완화하기 위해서도 항암제가 사용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뼈 전이가 심한 암 환자에게 항암제를 소량 사용해 통증을 줄이거나, 종양으로 인한 장폐색이 있는 경우 항암제를 통해 일시적 개선을 유도할 수도 있습니다.
즉, 완화 의료 중의 항암제 사용은 ‘생명을 위한 공격적인 치료’가 아니라,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전략적인 선택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 임상에서의 적용: 항암제 사용 사례
실제 의료 현장에서는 환자의 개별 상황에 맞추어 항암제를 계속 사용하거나 중단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다음은 실제 임상에서 항암제가 완화 의료의 일환으로 사용된 대표적인 사례들입니다.
- 말기 유방암 환자: 간과 폐에 광범위한 전이가 있었지만, 호르몬 수용체 양성인 경우 저용량 호르몬 항암제를 지속적으로 사용하여 통증을 경감하고, 활동성을 유지함.
- 폐암 말기 환자: 폐 전이에 따른 호흡곤란이 심했으나, 항암제를 통해 일시적으로 종양 크기를 줄여 산소 사용량을 줄이고 외출이 가능하도록 도움.
- 대장암 말기 환자: 종양으로 인해 장 폐색이 발생한 경우, 항암제를 통해 종양 크기를 감소시켜 일시적으로 장 기능을 회복시키는 사례.
이러한 사례들은 항암제가 치료를 위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증상 관리와 고통 완화를 위한 수단으로도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물론 모든 환자에게 이런 방식이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항암제 사용이 오히려 부작용을 유발하거나, 환자의 삶의 질을 저하시킬 수 있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사용 여부는 반드시 의료진과 충분히 상담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항암제 사용 결정 시 고려해야 할 요소들
완화 의료 중 항암제 사용을 결정할 때는 다양한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단순히 ‘사용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사용하는 것이 환자에게 도움이 되느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 환자의 의사: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환자 본인의 의사입니다. 환자가 적극적인 치료를 원한다면, 항암제 사용을 통해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을 고려해야 합니다. 반대로 치료보다 편안한 일상을 원한다면 무리한 항암 치료는 피해야 합니다.
- 기대 효과와 부작용의 균형: 항암제가 증상 완화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가능성이 있는지, 그리고 그에 비해 부작용이나 체력 저하 등의 부담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한 임상적 판단이 필요합니다.
- 경제적·정서적 부담: 항암 치료는 비용도 높고, 병원 방문, 검사, 대기 시간 등으로 환자와 가족의 에너지를 소모시킵니다. 환자의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가장 의미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 의료진과의 소통: 주치의 및 완화 의료 전문팀과 충분한 논의를 통해, 단기적인 증상 완화 목적이 있는 항암제 사용이 가능할지 여부를 결정해야 합니다.
이처럼 항암제 사용은 단편적인 판단이 아닌, 환자 중심의 통합적 접근을 통해 조율되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사용할 수 있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사용해야 하는가’입니다.
제도적·윤리적 측면에서의 고민
완화 의료에서의 항암제 사용은 단순히 의학적 판단을 넘어, 제도적·윤리적 문제도 함께 고려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건강보험 적용 여부, 의료기관의 방침, 가족의 의견, 환자 본인의 인식 수준 등이 결정에 영향을 미칩니다.
- 건강보험의 한계: 현재 우리나라의 호스피스·완화의료 건강보험 적용 기준은 항암 치료가 완료되거나 더 이상 치료가 어려운 상태에 이르러야 해당됩니다. 즉, 항암제를 사용하는 동안에는 공식적으로 ‘완화의료 병동’에 입원하기 어려운 구조입니다. 이 때문에 실제로는 외래 기반의 완화 의료 서비스에서 항암제와 병행치료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 의료기관의 운영 구조: 일부 병원은 완화 의료와 항암 치료를 병행하기 위한 팀 접근(Palliative Care Team)을 운영하고 있으나, 대다수 중소 병원에서는 인력 부족과 운영 시스템 한계로 인해 실질적인 병행이 어렵습니다.
- 윤리적 판단: 항암제를 중단하거나 유지하는 결정은 죽음을 앞둔 환자와 가족에게 큰 감정적 충격을 줄 수 있습니다. 이때 의료진은 환자의 존엄성을 지키면서도 현실적인 선택지를 제공해야 하며, 환자와 가족의 정서적 고통을 함께 감싸안는 접근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완화 의료 중의 항암제 사용은 단지 약물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의료 시스템과 가치 판단, 제도 개선의 문제와도 깊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결론: 항암제는 ‘치료의 중단’이 아닌 ‘삶의 설계’에서 선택하는 도구
완화 의료와 항암 치료는 서로 배타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환자의 상태, 의사, 목표에 따라 이 두 영역은 서로 보완적으로 작동할 수 있으며, 필요한 경우에는 항암제를 통해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완화 의료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선언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항암제는 그 여정에서 하나의 도구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결정은 반드시 신중하게, 그리고 환자 중심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환자와 가족이 충분히 이해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야말로 완화 의료가 지향하는 진정한 돌봄이며, 존엄한 삶의 마무리를 위한 출발점입니다.
'삶의 마무리 - 완화 의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완화 의료 중 말기 치료, 꼭 병원에서만 가능한가요? (1) | 2025.07.05 |
---|---|
완화 의료 중에도 수술을 받을 수 있나요? (0) | 2025.07.05 |
완화 의료 대상은 반드시 암 환자여야 하나요? (2) | 2025.07.04 |
완화 의료 말기 치료 중에도 심리 상담을 받을 수 있나요? (1) | 2025.07.04 |
완화 의료와 관련된 국내 법제도는? (0) | 2025.07.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