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기 치료의 시간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들이 집중되는 시기입니다. 어떤 치료를 받을 것인지, 어느 시점에서 치료를 중단할지, 연명 치료를 할 것인지, 그리고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이 모든 결정에는 환자의 ‘의사’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환자들은 이 시기에 의식을 잃거나, 말하기 어려운 신체적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치매, 뇌출혈, 루게릭병, 중증 암 환자들처럼 신경계나 호흡기계의 손상으로 인해 자기 의사 표현이 사실상 불가능해지는 상황은 완화 의료에서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이때 보호자들은 “지금 아버지가 이 치료를 원하실까?”, “어머니는 고통스러우시겠지만 말을 못 하시는 것 같아요”와 같은 갈등 속에 놓입니다. 환자의 뜻을 알 수 없다면, 누가 어떤 기준으로 치료 방향을 결정해야 할까요? 이 글에서는 말기 환자의 의사 표현이 어려운 상황에서 완화 의료가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법적·의료적 기준, 가족이 고려해야 할 태도, 제도적 장치의 활용 방법을 중심으로 구체적으로 안내합니다.
완화 의료에서 의사 표현 곤란 상황이란?
‘환자의 의사 표현이 어렵다’는 말은 단지 말이 안 나온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완화 의료에서는 아래와 같은 다양한 상황이 해당됩니다:
- 의식이 저하되거나 혼수상태인 경우
- 중증 치매나 뇌 기능 장애로 판단력이 손상된 경우
- 호흡곤란, 통증 등으로 말을 하거나 쓰기조차 힘든 경우
- 발음 장애(구음장애)나 청각·시각 손실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경우
- 루게릭병 등에서 정신은 명료하나 신체가 말을 따라주지 못하는 경우
이러한 경우 환자의 자율적인 ‘선택’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비자의적 치료 결정(non-voluntary decision)**이 필요합니다. 이때는 환자의 가치, 생전 의사, 가족의 의견, 의료진의 전문적 판단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게 되며, 완화 의료에서는 이 모든 요소를 신중하게 고려해 접근해야 합니다.
환자의 의사를 대신할 수 있는 제도: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대리 결정자
의사 표현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사전에 작성된 문서, 즉 **사전연명의료의향서(Advance Directives)**입니다.
이 문서는 환자가 의식을 잃기 전, 자신의 연명의료 중단 여부와 완화 의료 지향 여부를 공식적으로 기록해 두는 제도입니다. 보건복지부가 지정한 기관에서 등록 가능하며,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만 19세 이상이면 누구나 작성할 수 있습니다.
의향서가 작성되어 있지 않은 경우에는 법적으로 정해진 ‘대리 결정권자’ 순서에 따라 보호자가 대신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때는 아래 순위로 진행됩니다:
- 배우자
- 자녀(성인)
- 부모
- 형제자매
- 기타 직계혈족 또는 가족으로 인정되는 사람
대리 결정자는 환자의 뜻을 최대한 반영할 수 있어야 하며, 혼자서 임의로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의료기관에서는 대리 결정자의 진술 외에도, 다수의 가족 진술 일치 여부, 환자의 과거 발언 기록, 담당 의료진의 판단을 종합하여 결정의 정당성을 확보하게 됩니다.
의료진의 역할: 완화 의료 팀의 임상적 판단과 조율
환자가 말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뜻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완화 의료는 ‘의사 표현이 어렵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의사’를 최대한 반영하려는 치료철학을 가집니다. 이를 위해 완화 의료 팀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접근합니다:
1) 의학적 상황 분석
- 질병의 진행 속도, 의식 상태, 통증 반응, 자극에 대한 민감도 등을 종합 평가하여 치료 방향 결정
- 현재 상태가 회복 가능성이 있는지, 또는 점차 악화될 수밖에 없는지 판단
- ‘불필요한 연명’이 환자에게 더 큰 고통을 줄 수 있는 상황에서는 과감한 치료 축소도 고려
2) 환자의 표정·반응 분석
- 눈동자의 움직임, 손가락 반응, 심박수 변화, 얼굴 근육 움직임 등을 통해 불편함 또는 수용 가능성을 파악
- 가족과의 교감이 가능한 경우, 작은 신호를 통해 의미 있는 반응을 포착
3) 가족과의 상담·설득
- 가족이 과도한 연명치료를 원하거나, 환자의 고통을 외면하려는 경우, 의학적 중립성과 정서적 공감을 함께 활용한 상담을 진행
- ‘치료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에게 가장 적합한 치료를 선택하는 것’이 목적임을 설명
이러한 의료진의 판단은 단독으로 이루어지기보다, 완화 의료 다학제 팀(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영적 돌봄 담당자 등)이 회의를 통해 결정합니다. 또한 병원 윤리위원회, 보호자 동의 절차 등을 거쳐 공식적인 치료 방향을 설정합니다.
가족이 취해야 할 태도: 판단보다 경청이 먼저입니다
의사 표현이 어려운 환자를 앞에 두고, 가족은 종종 큰 혼란에 빠집니다. 죄책감, 두려움, 희망, 후회의 감정이 뒤섞여 “그래도 끝까지 해보자”거나 “이제는 포기하자”는 극단적인 결정을 서두르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태도는 바로 경청과 기다림입니다.
- 환자가 남긴 메모, 녹음, 과거의 말들을 떠올려 보세요.
- 평소에 어떤 삶의 방식과 가치를 중요하게 여겼는지 돌아보세요.
- 무조건적인 생존보다, 환자다운 삶을 원했는지, 어떤 죽음을 준비했는지 추론해 보세요.
또한, 가족들 간의 의견이 다를 경우에도 싸우기보다 환자의 관점에서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분이라면 무엇을 원했을까”**를 중심에 두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완화 의료 현장에서의 실제 사례와 교훈
사례 1.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없던 80대 환자
80대 남성이 폐렴 악화로 중환자실에 입원했으나, 의식이 없어 직접 의사를 밝히지 못함. 아들은 연명치료 중단을 원했지만, 딸은 끝까지 치료를 주장하며 갈등.
→ 의료진은 과거 환자가 남긴 음성메시지, 지인들의 진술 등을 통해 환자가 “중환자실은 싫다”고 말했던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바탕으로 연명치료 중단을 결정. 가족들도 끝내 합의함.
사례 2. 루게릭병 환자의 눈빛으로 전달된 의사
전신 마비로 말도, 손도 움직일 수 없는 50대 남성이 마지막 치료를 앞두고 눈의 깜빡임으로 ‘연명 거부’ 의사를 표시. 가족과 의료진은 고심 끝에 이 반응을 환자의 의사로 존중하고 완화 의료로 전환.
→ 이처럼, 작은 신호 하나라도 환자의 표현으로 존중하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완화 의료의 철학임을 보여줌.
결론: 말할 수 없는 시간에도, 우리는 환자의 뜻을 들을 수 있습니다
완화 의료의 가장 깊은 지점은 ‘존엄’입니다. 말기 치료 중 환자의 의사 표현이 어려워질 때, 우리는 그 존엄을 더 세심하게 지켜야 할 책임을 갖게 됩니다. 말 한마디 하지 못하더라도, 삶의 태도와 과거의 말들, 작게는 눈빛과 표정 속에 환자의 의사는 살아있습니다.
그 뜻을 읽어내고, 치료 방향을 정하며, 가족이 하나의 목소리로 결정을 내리는 과정은 때로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사랑과 책임이 만나는 순간입니다.
말하지 못하는 시간, 그 침묵의 언어를 존중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완화 의료가 지향하는 가장 본질적인 돌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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