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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마무리 - 완화 의료

완화 의료에서 환자의 자기결정권, 어디까지 존중해야 할까?

by 우주고래하루 2025. 6. 28.

의학 기술이 발전하며 삶을 연장할 수 있는 수단은 많아졌지만, 정작 많은 이들이 묻는 질문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마무리할 수 있을까?”입니다. 이 질문의 핵심에는 ‘자기결정권’이 자리합니다. 특히 완화 의료에서는 환자가 스스로 치료 방향, 연명의료 여부, 돌봄 방식 등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는 환자의 의사보다 가족이나 의료진의 판단이 앞서는 경우가 많고, 문화적‧정서적 요인으로 인해 환자의 목소리가 묻히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이 글에서는 완화 의료에서 자기결정권이 왜 중요한지, 어디까지 존중되어야 하는지를 법적, 윤리적, 심리적 측면에서 다루어 봅니다.

 

완화 의료에서 환자의 자기 결정권 존중 범위

환자의 권리로서의 자기결정: 법과 제도의 기반

자기결정권은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이며, 의료현장에서는 ‘환자의 인권’으로 구체화됩니다. 한국에서는 2018년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되면서 말기 환자가 사전연명의료의향서(AD)를 통해 연명의료를 거부하거나 완화 치료만을 선택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이 제도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첫걸음이었고, 이후 임종기 의료의 패러다임 전환을 촉진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제도의 존재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환자가 법적 서류를 미처 작성하지 못하거나, 인지 능력이 떨어졌을 때 가족이나 대리인의 결정으로 대체되는 일이 많습니다. 또한 의료진조차 법보다 보호 본능에 따라 연명치료를 지속하려는 경향이 있어, 환자의 의사를 존중하는 문화는 아직 완전히 자리잡지 못했습니다.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진정으로 보장하기 위해서는, 병의 초기 단계부터 환자와 함께 치료 방향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이뤄져야 하며, 환자가 자신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마무리하고 싶은지를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합니다.


자기결정권과 가족의 의견 충돌: 정서적 충돌의 조정

완화 의료에서 환자의 결정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원칙은 명확하지만, 현실에서는 가족과의 의견 차이로 인해 갈등이 발생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환자가 “더 이상의 치료는 원치 않는다”고 말했을 때, 가족은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치료를 받자”며 설득하거나, 심지어 환자의 결정을 묵살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충돌은 대체로 사랑에서 비롯되지만, 결과적으로 환자의 고통을 연장하거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가족은 환자가 원하는 삶의 마무리 방식을 존중해야 하며, 환자의 말에 귀 기울이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의료진 역시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합니다. 감정적 갈등이 격화되지 않도록 환자의 의사를 분명히 전달하고, 가족이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심리적 지지를 제공하는 것도 완화 의료의 중요한 기능입니다. 실제로 많은 병원에서는 완화의료팀에 사회복지사나 상담전문가를 포함시켜 가족 상담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다학제적 접근이 갈등 완화에 실질적인 도움이 됩니다.


자기결정이 아닌 ‘자기표현’부터 시작해야 하는 현실

이상적으로는 모든 환자가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는 문화가 여전히 존재하며, 말기 환자 스스로도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고령 환자의 경우 치매, 인지장애 등으로 인해 명확한 의사표현이 어렵기도 합니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은 환자가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 환경’을 만드는 것입니다. "치료를 원하십니까?"라는 이분법적 질문보다는, "요즘 가장 불편한 게 뭐예요?", "가장 걱정되는 게 뭔가요?"라는 질문이 더 적절합니다.

 

자기결정은 단순한 선택 이전에,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과 표현에서 비롯됩니다. 환자가 안전하고 편안한 환경에서 자신의 마음을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기결정권 존중의 출발점입니다.

 

의료진과 가족은 환자의 말뿐만 아니라 표정, 행동, 침묵 등 비언어적 메시지까지 민감하게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존중하고 해석하며, 환자가 스스로의 삶을 설계할 수 있도록 지지해야 합니다.


자기결정권을 중심에 둔 완화 의료의 실천 지침

완화 의료에서 자기결정권을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구체적인 실천 지침이 필요합니다. 먼저, 환자에게 자신의 병에 대한 정보를 정확하고 명확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이는 진단명, 예후, 치료 옵션 등을 포함하며, 환자의 이해 수준에 맞춰 설명되어야 합니다.

 

둘째, 의료진은 치료 초기 단계부터 환자의 가치관과 삶의 목표에 대해 질문하고 기록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무엇이 가장 두려우신가요?", "어떤 상태는 견디기 어렵다고 느끼시나요?" 등의 질문은 추후 의사결정의 기준점이 됩니다.

 

셋째,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을 일상화해야 합니다. 특정 나이, 질환에 국한하지 않고 누구나 미래의 의료 상황에 대비해 자신의 의사를 미리 기록할 수 있도록 캠페인과 공공교육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의료진과 가족 모두가 ‘결정하지 않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애매한 태도는 불필요한 연명치료, 환자의 고통 연장, 가족 간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명확하고 존중받는 결정은 환자의 삶을 지키고, 가족의 후회를 줄이는 가장 현명한 길입니다.


완화 의료에서의 자기결정권은 단순한 권리가 아닌, 인간 존재로서의 존엄을 지키는 기본 전제입니다. 치료를 지속할 것인가 중단할 것인가, 집으로 돌아갈 것인가 병원에 머물 것인가, 누구의 손을 잡고 삶을 마무리할 것인가—이 모든 질문에 대해 환자가 스스로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죽음을 대하는 방식은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완화 의료가 진정한 의미의 ‘돌봄’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결정권이 중심에 있어야 하며, 우리는 그 중심을 끝까지 지켜줘야 합니다.